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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를 구한 소녀, 설죽화

[역사]고려를 구한 소녀, 설죽화

 

역사를 살펴보면 주역은 남성들이었다.

특히 유명한 장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 재상 등은

거의 남성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를 위해 투혼을 바친 여성들이 많았다.

고구려 시기에는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고구려 수군총관이었던 연수영이 있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때

거란의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을 때 고려를 구하기 위해 투혼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설죽화....

 

설죽화(雪竹花)는 거란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공훈을 세운 소녀의 이름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본명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녀의 생애는 정사(正史)에서는 보이지 않고

야사(野史)에만 전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죽화를 가공의 인물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 시대에 설죽화란 인물이 실재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만큼 분명한 모티브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전승되어 전설로 정착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설죽화의 성은 이씨로,

그녀의 아버지는 고려-거란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이관이다.

설죽화는 눈 속에 핀 푸른 대나무 꽃이라는 뜻에서 스스로를 그리 불렀다고 한다. 

봉건사회에서 여성이 남장을 하고

군대에 들어가 싸운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10세기 몽골초원과 중국 북부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거란은 송과의 싸움에 앞서

동쪽의 고려를 먼저 꺾으려 했다.

고려를 놔둔채 송나라를 공략한다면

고려가 후방을 노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동경유수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했다.

사료에는 그 수가 80만이라 되어 있지만,

당시 정황을 보건대 그 수는 10만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 고려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 서희가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물러가게 했을 뿐 아니라

거란과 함께 여진을 협공하여 강동6주를 얻는 등

고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물론 그 대가로 고려는 송과 교류를 끊어야 했다.

하지만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과 교류를 했다.

이런 고려의 처사에 분개한 거란은 기회를 엿보다가 강조가 고려 7대 임금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옹립하자 이를 구실삼아 1010년 고려에 쳐들어왔다.

 

고려-거란 2차 전쟁에서

설죽화의 아버지 이관(李寬)이 전사하였다.

흥화진을 수비하던 도순검사 양규(楊規)의 휘하에 있던 이관은 귀성(龜城)전투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적을 격퇴한 양규 장군은

전사자의 유족에게 부고와 함께 유품을 보냈다. 굴암산으로 피난가 있던 설죽화와 어머니 홍씨부인은 아버지가, 남편이 전사했다는 비보와 유서를 받았다.

이 때 설죽화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이 땅에 침략 무리

천만 번 쳐들어와도

고려의 자식들

미동도 하지 않는다네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각오하고 싸우리라 믿으며

내 긴 칼 치켜세우고

이 한 몸 바쳐 내달릴 뿐이네

 

아버지 이관이 남긴 유서에 적힌 시였다.

홍씨부인은 남편이 남긴 시를 보고 설죽화를 바라보며 "아 네가 만일 사내아이였다면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으련만" 라고 절규하였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설죽화는

눈물을 닦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

어째서 여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없어요?

여자는 적이 공격해와도 수건을 뒤집어쓰고

도망가기만 하잖아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의 원수를 반드시 갚을 거에요"

홍씨부인은 딸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설죽화의 소망을 들어주는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하나 남은 피붙이인 딸자식을 남자의 세계,

그것도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 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설죽화의 집념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매일같이 어머니 앞에 끓어앉아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홍씨부인은 결단을 내렸다. 남편의 유언과 설죽화의 결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홍씨부인은 무관 집안의 막내딸로

남자처럼 대담하고 통이 컸다.

뜻을 정한 홍씨부인은

그날부터 설죽화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면학에 힘쓰도록 엄하게 지도했다.

홍씨부인은 궁술, 검술, 창술 등

자신이 아는 모든 무예를 설죽화에게 가르쳤다.

 

어느날 평소와 다름없이 무술을 익히던 설죽화 앞에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는 손녀딸이 무술을 배우고 있는 사실을 알고

크게 노했다.

"아녀자가 무예훈련을 하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리고 설죽화의 혼처를 정해놨으니

그리 알고 혼례 준비를 하라는 엄명을 내린 채

돌아가 버렸다.

 

할아버지의 말에 놀란 모녀는 고민하다

서둘러 집을 챙겨 몰래 자신들이 알고 지내던

산속 나무꾼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설죽화는 이 곳에서 어머니의 엄한 지도에 따라

토끼, 사슴, 승냥이 등의 동물을 상대로

궁술, 검술 단련에 힘을 썼다.

하지만 험한 산속 생활로

늙은 홍씨부인에게 병을 안겨주었다.

설죽화는 열심히 홍씨부인을 간호했지만,

병세는 점점 심해졌다.

 

그런데 이 때

거란군이 다시 침입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101812월 일로 거란의 세 번째 침략이었다. 홍씨부인은 설죽화에게 고려군에 입대하라 재촉했지만, 병이든 노모를 홀로 남겨두고 갈 수 없었다.

어느날 설죽화가 약초를 캐서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바닥에 한 장의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이다.

"내 일은 걱정말고 빨리 침략자를 토벌하거라"

설죽화는 놀라서 밖으로 뛰쳐 나갔다.

주변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어느 곳에도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죽화는 어머니의 굳은 뜻을 깨닫고

전장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남장을 한 설죽화는 강감찬 장군 진영으로 찾아갔다.

고려군 본영에 도착한 설죽화는

자신이 강감찬 장군의 친척이라 속이고,

강감찬 장군을 대면하게 되었다.

설죽화를 뚫어지게 쳐다본 강감찬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친척이라 했는데, 정말이더냐?"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거란 침략군과 싸우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으고자 합니다"

강감찬은 설죽화에게 본명은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설죽화는 자신의 본명은 말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

 

흰 얼굴에 오뚝한 콧날,

두 개의 눈동자는 머루처럼 새까많게 반짝이고, 불그스레한 뺨은 젊음의 생기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마에는 단단하게 머리띠를 매고

저고리에 폭이 좁은 바지를 입은 모습은 날씬했다.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겠다는 너의 결심은 훌륭하다. 하지만 너는 아직 어리다.

외적과 싸울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때도 늦지 않다"

 

그러자 설죽화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라를 지키는데 소년은 안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적을 무찌르겠다는 투지라 생각됩니다"

 

설죽화의 청이 간절하여

일단 무술시범부터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설죽화는 뛰어난 창검술로

강감찬을 놀라게 하였다.

그녀는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는 긴 검과 하나가 되어 능수능란하게 기술을 선보였다.

강감찬은 설죽화를 소년 선봉장으로 삼았다.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은

단숨에 고려 수도 개경을 점령하려 했지만,

강감찬의 전략에 의해 그 시도가 좌절되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려 할 때

둑을 터뜨려 수공작전을 펼치고, 기병부대로 반격했다. 강감찬은 고구려 때 을지문덕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를 철벽같이 방어하고 적을 유도하며 끌고다니는 병량(兵糧)공격에도 성공했다.

 

10191월 굶주림과 추위로 지친 거란군은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이 때 백마를 타고 질풍처럼 뛰어들어

적군을 대혼란에 빠뜨리는 소년장수의 모습이 보였다.

설죽화였다.

 

설죽화는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며 닥치는대로

거란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설죽화가 이끄는 소년선봉대가

적진으로 돌격하여 용맹한 할약을 보이고 있었다. 이리하여

'고려군에 소년 장군이 있고, 소년 선봉대가 있다'는 소문이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구주성 남문

고려군은 도주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 흔히 귀주로 알려져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구주다) 일대에서 대섬멸전을 전개했다.

선봉에 서며 닥치는대로 거란군을 베어내며

설죽화가 크게 활약하자,

거란군이 그녀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힘껏 몰아붙이며 방어했으나

계속된 공격에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설죽화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몸은 점점 지쳐갔으나

그럴수록 머릿 속에는 용맹함과 질긴 의지만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용감히 싸우던 설죽화에게

거란군이 쏜 화살이 가슴을 꿰뚫었다.

무심결에 몸을 뒤로 젖힌 말 위의 그녀에게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결국 그녀는 화살이 몸에 촘촘히 박히고 말았다.

치열한 대접전 끝에 고려군은 거란군을 물리쳤다.

승리의 함성이 울렸지만

이내 그 함성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고려장수 설죽화가 시신으로 누워져 있었다.

설죽화의 애마가 유해를 등에 태운 채

본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전사한 설죽화의 품속에 유서가 나왔다.

그녀의 유서에는

자신이 지난 전쟁에서 전사한 이관의 딸이라는 것과 남장을 하고서까지 싸우고 싶었던 이유,

강감찬에게 사실을 밝히지 못한 점을 용서해달라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좋은 꿈을 꾸는것마냥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설죽화의 유해를 보며 강감찬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젊디젊은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켰다.

그 충심 결코 잊지 않겠다.

자네같은 젊은이가 있는한

우리 고려는 어떤 외적이 쳐들어와도

흔들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장하도다.

그대는 고려의 꽃이요,

고려의 진정한 딸이다"

 

거란군을 격파하고 개선하는 고려군을

고려 8대 임금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 나왔다. 현종은 강감찬의 머리에 황금으로 만든 8개의 꽃을 얹어주며 그 공적을 치하했다.

강감찬은 군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의 대승리는 오로지 혼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 백성과 병사들의 활약에 의한 것입니다.

이 늙은이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강감찬은 현종에게 상주하여

이번 전쟁에 공로가 있는 용감한 자들은

모두 표창토록 하였다.

설죽화를 비롯하여 그녀의 아버지인 이관,

어머니 홍씨 부인에게 각각 공신과 열녀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설죽화가 생활하고 무예를 단련했던

화반암 들판에는 그들 일가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으며 매년 기념제를 지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993년부터 시작되어 1019년에 이르는

30년에 걸친 거란과의 대전쟁에서

고려가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고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의 강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설죽화와 같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의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남장을 하며 전쟁터를 누빈 고려의 여성, 설죽화...

설죽화가 보여준 투혼은 프랑스 잔 다르크에 뒤지지 않는 구국혼의 상징이었다.

설죽화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여성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본받아야 할 모범이 아닐까?

 

설죽화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우리 역사에 이런 자랑스런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이 여성이 지금껏 잊혀져 왔다는데 서글퍼지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의 몸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설죽화란

여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