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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찾기

중국의 역사왜곡

중국의 역사왜곡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탁록대전.

 

한중 고대사를 괴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에서

첫번째 인물은 2100년전 한나라 무재(BCE 141~BCE 87) 때의

사관이던 사마천司馬遷(BCE 145~?)이다.

사마천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紀]를 편찬했고

그 첫번째 왜곡 작품의 상징적 문구가 [오제본기五帝本紀] 서두에 나오는

"금살치우"(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이다.

 

당시 옘제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8대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배달의 14세 자오지 환웅천황(치우천황)

웅도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 시켰다.

이때 서방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잃으켜 이에 대항 하였다.

그리하여 동양 최초의 국제전쟁인 탁록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10여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의 시조가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중국 한족에게 까지

숭배와 추안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금살치우'로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왜곡된 역사

원래의 역사 

 봉기자어조선

封箕子於朝鮮

(사마천 [송미자세가宋薇子世家])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사마천 [송미자세가宋薇子世家])

 사대주의 자들은 이 한마디만 믿고

기자가 조선에 봉해젔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새로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하북성

태행산 일대로 주나라와 하등 무관한 고조선

영토 였기 때문에 애당초 주나라가 그를 제후로

봉할수도, 신하로 삼을수도 없었던 것이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중국의 5천년 역사에서

자기네 한족 출신의 왕이 왕조를 열어서

대륙을 통치한 일이 거의 없다.

중국의 삼황오제로 부터 고대 하상주 3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통치했던 왕조나 그들의 문화를 보면,

단순히 동이족이 문화를 전수해준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조선 민족이

직접 현지에서 나라를 건설한 창업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