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의 진실은?
21세 소태단군{단군세기]
제순수국중이라가 남지해성하사 대회부로하사 제천가무하시고 잉소오가하사
帝巡狩國中이라가 南至海城하사 大會父老하사 祭天歌舞하시고 仍召五加하사
여지의전위하실새 자위노권우근이라 하시고 욕위정어서우여라 하시니라.
輿之議傳位하실새 自謂老倦于勤이라 하시고 欲委政於徐于餘라 하시니라.
환살수백리이봉지하사 명위섭주하시고 호왈기수라 하시니라.
環薩水白里而封之하사 命爲攝主하시고 號曰奇首라 하시니라.
임금께서 나라를 순수하시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크게 모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셨다. 이때 오가를 모아놓고 옥좌를 양위할 일을 함께 의논할때 "내가 이제 늙어
일하기가 고달프다"라고 말씀 하시고 "서우여에게 정사를 맏기겠노라" 하셨다. 이에 살수 주위에
땅 백리를 분봉하여 섭주로 삼고 기수라 하셨다.
25세 솔라단군{단군세기]
정해삼십칠년이라 기자가 사거서화하야 사절인사하다.
丁亥三十七年이라 箕子가 徙居西華하야 謝絶人事하다.
재위37년 정해(BC1114)년,기자가 서화에 살면서 누구도 안맘나겠다며 인사를 사절했다.
46세 보을단군(기후가 번조선 왕이 되다)[단군세기]
무술십구년이라 정월에 읍차기후가 이병입궁하고
戊戌十九年이라 正月에 邑借箕詡가 以兵入宮하고
자이번조선왕으로 견인청윤한대 제허지하고 사견비연하시다.
自以番朝鮮王으로 遣人請允한대 帝許之하고 使堅備燕하시다.
재위 19년 무술(BC323)년 정월에 읍차 기후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윤허하시고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강화토록 하셨다.
기자 조선의 왜곡과 실체
중국문헌 [성서대전][은전殷傳]에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조선으로 도망간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 하지만 기자 조선은 한마디로 한민족사를 그 첫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위해 중국이 날조한 조선이다. 이것은 고조선 말기의 삼조선 가운데 요동땅에 위치했던
번조선의 마지막 왕들이 기箕씨 출신이었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번조선 말에 6대에 걸친
기씨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 기씨 왕들은 지금으로 부터 약 3,000년전 은나라가 망할때
고조선으로 넘어온 망명객인 기자의 후손이라고 추정할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기자가
새 나라를 세웠으며 그 나라가 BCE194(번조선이 망한 해)까지 존속햇다고 억지를 부리는것이다.
기후(70대)→기욱(71대)→기석(72대)→기윤(73대)→기비(74대)→기준(75대)
참으로 통탄할 일은, 존화 사대주의에 빠진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국의 이러한 역사 날조에
동조하여 기자를 "조선이라는 저급한 오랑캐 나라를 교화시켜준 은인"으로 모셨다는 사실이다.
민일 중국 사서들의 기록이나 이땅의 유학자들 주장처럼 은나라 출신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어 고조선을 문명화 시켯다면, 고조선의 유물들이 모두 은나라 양식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조선의 특성의 청동기 유물인 것으로 판명이났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다 숨기지 못하고 은연중에 기자가 조선을 세운것이 아님을 중국 스스로 내비치는
기록이 있다. [사기][송미자세가]의 "(주나라 무왕이)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하였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제후라면 그도 당연히 무왕의 신하 일텐데
왜 신하로 삼지 못한 것일까? 기자가 새로 정착한 곳이 주나라와 하등 무관한 고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를 신하로 삼을수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한 사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진실을 알면 당시 고조선은 주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무왕의 혁명을 후원한 상국上國이었다.
에컨대 기자조선설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내세우기 위해 주나라보다 1,200년 이나 앞서 탄생한 동북 아시아
문명의 주인공인 고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날조한 것이다<상생출판 단군세기>
조선의 마지막 천도에 대해 [삼국유사][고조선기]는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기 때문"이라고 엉뚱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중국에서 왜곡 날조한 기공의 역사를 꿰맞추기 위해 고조선사의 허리를 자르고 기자 조선을 끼워넣은 것이다. 이는 당시 학자, 승려, 관리들이 얼마나 모화사대慕華事大사상에 물들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핳 수 있다.
기자 조선은 4,338년 전에 배달국을 계승하여 개국한 뒤 2,096년간 존속한 독립국가 고조선을 3,127년 전에 개국하여 겨우 900년간 존속한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끌어 내리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이로인해 대한민국의 역사는 중국의 5천년보다 훨씬 짧은 3천년으로 쪼그라 들었다. 계다가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매한 한민족이 중국의 은헤를 입어 제후로 봉해짐으로써 출발한 국가"로 매도 당한 것이다.<개벽 실제상황>
그렇다면 기자는 과연 누구인가?
기자는 은나라 왕족으로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왕 시절의 세 현인(기자, 비간, 미자)중 한사람이다.
주왕에게 직간한 죄로 감옥에 투옥 되었다가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유민 5천명을 이끌고 번조선의 국경지역
산서성 태원으로 이주하였다. 망국 은나랑에서 고조선으로 망명을 한 것이다. 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
고향 서화(현 하남성 서화현)로 돌아가 생을 마감 하였다. 주 무왕의 등극 연대(bce1122)로 볼때 기자는
약 3천년전의 사람이며 당시 고조선은 25세 솔나단군(재위 BCE 1150~BCE 1063)이 통치하고 있었다.
산동성 조현에 있는 기자묘 : 만일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무덤이 있는 아곳이 조선의 영역이었어야
하므로한반도로 왔다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일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고조선의 세력이 지금의 하북
산동성까지 미쳤다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상생출판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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