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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찾기

위만 조선의 진실은?

위만 조선의 진실은?

 

1, 고조선은 왜 망했는가?

 

오늘의 사가들은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머리와 꼬리만 있지 몸통은 없는 역사,(단군세기 참고)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의 부단군 이었을 뿐이다 더더욱 진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속에 퇴위하여 고조선의 본조시대가 마감된 것은, 잔적 위만이 번조선을 점거하기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요컨대 단군 조선은 지금의 강단 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 한족의 위세에 눌려 망한것이 아니다. 병권을 셋으로 나누어 삼조선이 독자적으로 나라를 경영하게 됨에 따라

국력의 구심점이 없어져서, 내란에 의해 스스로 멸한 것이다.

고조선은 원래 신교의 제사장인 단군왕검이 삼신 일체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던 신정국가였다. 따라서 삼한 제도의 쇠퇴는 곧 종교의식의 약화로 따른 신교 문화의 붕괴 과정으로 보아야 하며, 그 첫 번째 과정이 바로 삼한(진한, 번한, 마한)에서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개편된 것이다.<개벽실제상황>

 

2, 위만은 그럼 누구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였다. 중원을 평정한 한고조는 그의 반려자인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 하였는데,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뒤 부하 1천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족 망명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그대로 둔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194년)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이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 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헤를 베풀어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식민 사학자 이병도가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인 복장을 하였다 하여 조선의 유민이라 하였는데, 현행 국사학계에서 이를 정론으로 받아들여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졋다는 엉터리 교육을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했을뿐 아니라,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각목]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하였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은 "한명의 강도에 불과하다"하였으며, 신채호 선생은 "(위만조선은) 우리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하였다.<개벽실제상황>

 

3, 위만조선의 실체는?

 

일제는 일연이 [위서]에서인용한 단군성조의 고조선 건국은 믿을수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그가 [한서]에서 인용한 위만에 대한 서술은 적극 수용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1천명을 거느리고 패수를 건너와 진나라의 옛 빈 터전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왕이되어 왕검에 도읍하였다[삼국유사]는 기록을 근거로 위만조선을 한민족 역사의 출발점으로 왜곡하였다. BCE 194년 전까지 한민족은 국가 조직을 가추지 못한 미개한 생활을 하다가 이방인인 위만이 나라를 세워줌으로써 비로소 역사다운 역사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밀어내고 대신 위만을 조선의 개국조로 앉혔다.

이것은 중국의 고조선사 왜곡의 재탕이다. 즉 중국은 "위만이 기자조선의 마자막 왕인 준왕을 내쫒고 위만조선을 세웠으며, 위만의 손자 우거때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토벌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세워 400년간 중국의 식민지로 삼았다."라고 하여 이 땅의 고대사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라는 식민지 역사로 둔갑시켰다. 일본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역사가 위만조선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왜 일본은 위만 정권을 한민족사의 시작으로 선정한 것일까?

일찍이 일본은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1,300년인 자기들의 역사를 2,600년으로 갑절이나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 시절 쓰다소우키치, 이마니시류 같은 학자들을 내세워 조선의 뿌리 역사를 잘라내 버리고 조선사를 축소시키는 작업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위만 조선설을 내세움으로써 일본 역사의 두배에 가까운 4천년 조선사를 2,200년사로 단축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은 일본보다 역사가 짧으니 일본 제국의 속국이 되어 영원히 식민통치를 받아 마땅하다,"는 억지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오직 단군 조선만이 한민족 고조선이며, 이를 계승한 정통 왕조는 해모스의 북부여인 것이다.<상생출판 [단군세기]>

 

4, 일본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

 

일본은 먼저 1910년 11월부터 약 1년 2개월 동안 행정관청과 군경을 총 동원하여 조선 강토 구석구석을 뒤지며 사료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총 51종 20여만권을 수거한뒤, 주요 도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렸다. 단군 조선에 관한 사료도 이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한민족 상고사의 실체를 알수있는 주요 서적을 일본으로 가져가 황실 도서관에 깊숙히 감추었다.

그후 일몬은 조선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두고 조선의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사] 35권을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 시책에 맞춰 소위 반도식민사관을 확립하였다. 당시 조선사편수회에 침여했던 이병도는 광복후에 서울데학교 역사학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일제가 조선 식민 지배를 위해 만들어낸 식민사관이라는 독소가 우리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지금까지도 우리 한민족의 정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상생출판 [단군세기]>

 

5, 간도수로 접어드는 역사의 전환점

 

위만의 찬탈에 의해 고조선의 왼쪽 팔인 번조선의 준왕이 왕검성에서 쫒겨나면서(BCE 194) 한민족은 역사의 분기점을 맞게 되었다. 삼조선의 유민들 가운데 일부는 해로를 통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상장군 탁을 진왕으로 세우고, 옛 고조선(삼한)의 정신을 되살려 소규모로 삼한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인 남삼한 역사의 시작이다.

고조선이 망하면서 역사의 무대는 북삼한에서 한강 이남의 남삼한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즉 가을개벽의 구심점이자 동방 문명의 원 핵자리요 개벽의 숨구멍인 동북 간방으로 조여들어온 것이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한 바, 이로써 한민족은 본격적인 간도수 실현의 역사시대를 준비하게 되었다.<개벽실제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