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상고사의 연결고리 북부여(열국시대의 시작)
우리는 부여의 역사를 잃어버렸다. 우리 상고사의 잃어버린 고리가 되는 부여사를 찾는 해결의 열쇠가 바로 북부여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발혀내는 일이다.
[북부여기]는 고조선이 망한 후 열국시대로 옮겨가면서 복잡하게 전개된 우리 역사의 국통맥을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과 북부여가 계승관계가 아닌 별도의 연원을 가진 국가로 생각하였으며 삼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였다. 이런 면에서 휴에거사 범장이 쓴 [북부여기]는 모호함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북부여와 고구려, 동부여, 삼한의 연원을 드러내어 우리 동방 역사의 뿌리를 밝혀주는 대단히 귀중한 기록이다.
북부여는 1세 해모수 단군이 건국하여 4세 고우루 단군(BCE 239~BCE 86)
북부여의 건국
임술진시시에 신인대해모수가 기어웅심산하시니라.
壬戌秦始時에 神人大解慕漱가 起於熊心山하시니라.
정미한혜시에 연추위만이 절거서비일우할새
丁未漢惠時에 燕酋衛滿이 窃居西鄙一隅할새
번한준이 위전부적하야 입해이망하니 자차로
番韓準이 爲戰不敵하야 入海而亡하니 自此로
삼한소솔지중이 태천민어한수지남하고[삼성기 상]
三韓所率之衆이 殆遷民於漢水之南하고[삼성기 上]
임술(BCE 239)년 진시황때 신인 대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E 194)년 한나라 혜제때 연나라 유민들의 우두머리 위만이
서쪽 변방땅 일부를 도적질하여 웅거하였다.
이에 번한의 준왕이 맞서 싸웠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에 속해있던 백성들은 대부분 한수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나뉘어진 분열과 통일의 역사과정은 생장성 삼변성도의 원리에 따라 세번에 걸쳐 변천해 왔다. BCE 239년에 고조선을 계승한 해모수가북쪽에 북부여를 세웠다, 그리고 남쪽에는 BCE 195년에 최숭이 평양에 낭락국을 세우고, 막조선, 번조선의 백성들이 남천하여 한강 이남에 남삼한을 수립했다. 바로 이때가 1단계 남북국시대로서 우리 민족이 간도수 실현을 위해 간방땅으로 좁혀들어오는 첫 발짜국을 떼는 시점이었다.<상생출판[북부여기]>
고조선이 망해가고 있을 무렵 한민족사의 새 시대를 연 인물이 있었다.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의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배달민족의 정기가 어려있는 웅심산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개국하였다. 그는 왜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했을까? 고조선의 제3왕조,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대부여의 북방에 도읍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 일대에 도읍해 있던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이후 정치권력을 상실한 막조선의 오가 부족장들이 난하유역으로 부터 건너온 최숭에게 왕검성을 넘겨주고 한강 이남으로 남하 하였다. 이렇게 대거 남하한 삼조선의 백성들이 각각 무리를 지어 나라를 세웠으니, 한반도 남부에서 새로운 삼한 "후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진한이 중심체가 되었던 전삼한과 달리 이때는 상장군 탁이 세운 마한(지금의 익산지방)이 중심이 되었다. 이 마한에서 각기 100리씩 땅을 떼어주어 경주지역에 진한이, 그 아래 김해 지역에 변한이 세워졌다.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후삼한(남삼한)만 다루고 있을뿐 전삼한(북삼한)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상생출판[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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