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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남부여)건국 이야기[상생출판 북부여기] 백제(남부여)건국 이야기[상생출판 북부여기] 1, [삼국사기]의 기록 백제의 뿌리 역시 부여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어머니는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고구려 창업 공신인 연타발의 딸로 동부여 왕 해부르의 서손인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고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던중 아버지 연타발이 고주몽의 창업을 도운 것을 계기로 주몽성 제의 왕비가 되었다. 유력 가문 출신인 소서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재물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고주몽은 일찍이 동부여에 남기고 온 부인 예씨 소생인 적자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소서노가 낳은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는 장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땅에 눌러 앉아있는 것이.. 더보기
고구려 건국 이야기 고구려 건국 이야기 다물多勿은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연호이며 고구려의 국시國是이다. 배달국 신시 시대와 단군 조선시대의 옛 강토와 신교문화를 다시 부흥시켜 화복한다(복구토復舊土)는 고구려의 거국적 민족 운동과 그 정신을 말합니다. 지계해춘 정월하야 고추모가 至癸亥春 正月하야 高鄒牟가 역이천제지자로 계북부여이흥하사 亦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복단군구장하시고 사해모수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사 위태조하시고 시건원하사 위다물이라 하시니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이라 하시니 시위고구려시조야시니라.{삼성기 상] 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삼성기 上] 계해(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그리하여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 더보기
연나부부여(서부여) 연나부부여(서부여) 1세 대소왕의 종제~7세 의라왕(CE 22~494) 추칠월에 왕종제가 위국인왈 선왕이 신시국망하야 秋七月에 王從弟가 謂國人曰 先王이 身弑國亡하야 인민이 무소의하고 갈사는 편안하야 불능자국하고 人民이 無所依하고 葛思는 偏安하야 不能自國하고 오역재지노하하야 무망흥복하니 영항이도존이라하고 吾亦才智魯下하야 無望興復하니 寧降以圖存이라하고 이고도인민만여구로 투고구려한대 고구려가 봉위왕하사 以故都人民萬餘口로 投高句麗한대 高句麗가 封爲王하사 안치연나부하시고 이기배에 유낙문하야 사성낙씨러시니 安置椽那部하시고 以其背에 有絡文하야 賜姓絡氏러시니 후에 초자립하야 자개원서북으로 사도백랑곡하고 後에 稍自立하야 自開原西北으로 徙到白狼谷하고 우근연지지러니 지문자열제명치갑술하야 이기국으로 又近燕之地러니 至文咨烈帝明.. 더보기
갈사부여 갈사부여 1세 갈사왕(대소왕 동생)~3세 도두왕(CE 22~68) 夏四月에 王弟가 與從者數百人으로 하사월에 왕제가 여종자수백인으로 奔至鴨綠谷하야 見海頭王出獵하고 분지압록곡하야 견해두왕출렵하고 遂殺之 而取其民하야 走保曷思水濱하야 수살지 이취기민하야 주보갈사수빈하야 立國稱王하니 是爲曷思라.[북부여기] 입국칭왕하니 시위갈사라.[북부여기] 여름4월, 왕의 아우가 추종자 수백명과 더불어 길을 떠나 압록곡에 이르렀다. 마침 해두국海頭國 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는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曷思水 물가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일컬으니, 이 나라가 바로 갈사국(갈사부여)이다. 至太祖武烈帝隆武十六年八月하야 지태조무열제융무십육년팔월하야 都頭王이 見高句麗日强하고 遂擧國自降하니 도두왕이 견고구려일강하.. 더보기
가섭원부여(동부여) 가섭원부여(동부여) 1세 해부루~3대 대소(BCE 86~CE 22) 을미이십삼년이라 乙未二十三年이라 북부여가 거성읍항하고 루애욕보어늘 北夫餘가 擧城邑降하고 屢哀浴保어늘 제청지하고 항봉해부루위후하고 천지차릉하시다.[북부여기] 帝聽之하고 降封解夫婁爲侯하고 遷之岔陵하시다.[북부여기] 재위 23년 을미乙未(BCE 86)년 북부여가 성읍을 바쳐서 항복하고, 왕실만은 보존시켜 주기를 여러번 애원 하는지라 고두막 단군께서 들어 주시어 해부루解夫婁의 봉작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解夫婁으로 이주해 살도록 하셨다. 동명왕은 당시 북부여 황실의 해부루 단군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어 동북쪽 가섭원(길림성 롱화현) 땅의 제후로 봉하였다. 이리하여 BCE 68년에 가섭원 부여가 탄생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 더보기
졸본부여(후북부여) 졸본부여(후북부여) 5세 고두막한~ 7세 고주몽(BCE 58~ ) 서압록인고두막한이 창의흥병하야 역칭단군하시고 西鴨綠人高豆莫汗이 倡義興兵하야 亦稱檀君하시고 을미한소시에 진거부여고도하야 乙未漢昭時에 進據夫餘故都하야 칭국동명하시니 시내신라고양야라.[삼성기 상] 稱國東明하시니 是乃新羅故壤也라.[삼성기 上]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 칭하였다. 을미(BCE 86)년 한나라 소제때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서울을 점령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칭하니, 이곳은 내내 신라의 땅이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후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해에 요동 너머의 북부여를 침공 하였다. 이때 서압록 출신의 고두막한이 의병을 모아 거세게 저항하여 마침내 한족을 물리치니 한무제의 동방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