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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찾기

백제(남부여)건국 이야기[상생출판 북부여기]

백제(남부여)건국 이야기[상생출판 북부여기]

 

1, [삼국사기]의 기록

백제의 뿌리 역시 부여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어머니는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고구려 창업 공신인 연타발의 딸로 동부여 왕  해부르의 서손인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고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던중 아버지 연타발이 고주몽의 창업을 도운 것을 계기로 주몽성 제의 왕비가 되었다. 유력 가문 출신인 소서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재물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고주몽은 일찍이 동부여에 남기고 온 부인 예씨 소생인 적자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소서노가 낳은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는 장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땅에 눌러 앉아있는 것이 이로울것이 없음을 알고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소서노의 두 아들은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류는 미추홀(오늘날의 인천지역), 온조는 한강 이남에 정착 하였다. 온조는 하남성에 위례성을 쌓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백제의 건국사화이다.

 

2, [환단고기][태백일사]의 기록: 소서노 왕국과 온조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삼국사기]의 내용과 약간 다르지만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소서노는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삼을 것이라는 말에 자기가 낳은 두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그러던 중 사람들로부터 패대浿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패대의 땅은 현제의 하북성 난하 부근이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이주하여 발해 연안에 있는 진. 번 사이의 지역에 정착하였다. 밭을 사고 농장을 세워 많은 돈을 벌었다.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가세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주몽에게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귀속 되기를 원했는데 주몽은 이를 기뻐하며소서노를 "어하라"에 칙봉하였다. 어하라는 백제의 초기 왕을 말한다. 그러므로 백제는 소서노 시기에 사실상 건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서에 백제의 건국지를 요서군에 있는 대방고지라고 한 기록이 이를 입증해 준다 할것이다.

 

BC 19년 소서노가 죽자 장자 비류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이때 마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동생 온조에게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으니 가서 나라를 세울 때"라고 건의 하였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한강 유역 미추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텅빈 땅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오랜 뒤에 하남의 위지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하남 위지성이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든, [태백일사]의 기록이든 백제는 건국 주체가 부여족 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백제 왕의 성씨가 부여씨였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백제가 옛 부여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강렬히 유지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백제 26대 성왕(523~554)은 538년에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부여족의 뿌리깊은 번통을 강조하여 국호를 "남부여"라 고 하였던 것도 이런 의;식의 발로였다.

 

3 부여 문화의 일본 전파

초기 일본 왕실은 부여계에서 나왔다. 일찍이 기다 사다기지 등능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였다고 밝힌바 있다. 에가 나오미 동경대 교수도 일본 국가의 기원이 동북아시아의 부여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에 있다는 기마민족 구가설을 발표하여 학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부여계가 일본을 정복하여 일본 역사 최초의 고대 국가를 건설 했다고 주장하였다. 소위 야마토정권(370년)을 세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