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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찾기

삼신 상제님을 수호한 낭가의 상무정신.

삼신 상제님을 수호한 낭가의 상무정신.

 

기나긴 세월 온갖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원동력이 바로 낭가의 상무정신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낭가의 상무정신이 인류의 뿌리 종교인 신교의 삼신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설 하였다.

또한 일십당一十當 이맥李陌(1455~1528)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 "낭은 곧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낭자즉삼신수획지관야郎者卽三神守謢之官也"라하엿다.

 

"삼성기"는 낭가의 역사적 뿌리를 밝혀주고 있다.

 

어시에 환웅이 솔중삼천하사 강우태백산정신단수하하시니

於是에 桓雄이 率衆三千하사 降于太白山頂神檀樹下하시니

위지신시오 시위환웅천왕야시니라.

謂之神市오 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환웅께서는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마루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황"이라 한다.[삼성기 하}

 

환웅 천황께서 동방의 새 역사를 개창할 때 환국에서 거느리고 온 문명개척단 3천명이며 이들을 제세핵랑이라 불렀다.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 시대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관료, 제사장, 장교가 모두 미혼의 젊은이들인 낭가에서 나왔다. 그들은 삼신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교의 성소인 소도의 경당扃堂에서 문무에 정신하였다. 단군조의 국자랑, 북부여의 천왕랑, 고려의 선랑, 국선, 재가화상,재가화상으로 이어졌다. 이후 낭가제도는 묘청의 서경전도 운동의 실패로 국풍파가 유학파에게 패함으로서 그 명맥이 쇄잔하게 되었다.

 

그러나 낭가의 정신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서 국혼을 밝혔다.

최후의 일인 까지 대몽항쟁을 펼친 삼벌초에서, 조선시대 진유의 선비 정신에서, 그리고 갑오동학 혁명과 구한말의 항일 구국 운동, 광복군의 독립운동에서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낭가의 정신이 빛을 발산하였다.

 

낭가 정신은 곧 "상제문화의 수호자" 였으며 진정한 "한민족의 국학"인가를 가늠하는 잣대는 바로 삼신상제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모셔 왔으며, 상제문화를 지켜왔는가에 그 핵심이 있다. 따라서 상제문화를 배재한 국학이란 있을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