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족의 역사찾기

한민족 고대 역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단재 신채호

한민족 고대 역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단재 신채호

 

굽힘 없는 강직한 성품에 일본에 고개 숙이는 것이 싫어 머리를 꼿꼿이 세운채 세수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단기4213년(1880년) 양력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자치통감을 통달하고,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그 박식함과 천재성으로 이름을 떨쳤다.

 

26세에 박사가 된 선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뛰어난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그 문명을 날렸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단재 선생에 대해 당대 우리나라 사가들 중에서 제 1인자이며, 문장 호걸로도 찻 손가락에 꼽아야 한다고 했다.

 

1910년 맨몸으로 조국을 떠난 선생은 남북 만주로,북중국, 시베리아를 주유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다. 선생은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 되었음을 확인하며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조선사를 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없어져 버렸다고 비판하며 집안현(고구려 유적지)을 한번 본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것 보다 낫다"고 말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민족의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선생은 중국 망명시절, 너무도 빈곤하여 우리 역사의 유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어 발굴 조사를 하지 못함을 비통해 했다. 또한 책 살 돈이 없어 하루 종일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주인의 핀잔을 맞으면서도 요긴한 구절을 베껴썼다. 또한 독서력이 뛰어나 책장을 헤아리는 것 같이 훌훌 넘기면서도 책 내용을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생은 <조선문화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에 소개 했는데, 수십만 독자들로 부터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고 "조산 역사의 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선생은 기존의 한국사, 즉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이어진 역사인식 체계를 비판하고 데단군조선-삼조선-부여-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되는 역사체계를 다시 세웠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 대륙이 우리 민족의 영토였음을 밝혔다. 선생의 이러한 역사 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월간개벽 2007 3월호>